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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READING

2023. 3. 13.

   작년인가 재작년에 생일선물로 종이책을 받았었는데...

   제법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도 이제 웹소설과 함께 전자책 문화에 완전히 길들여졌는지 종이책을 붙잡고 읽을 엄두가 안 나더라고... 그래서 미루고 또 미루다가...

   탐라에서 가족이 읽는 걸 보고 문득 생각나서 이북 중복구매 후 읽기 시작

 

   근래 들어서...는 아니고 원래도 그랬지만 아무튼 나는 수필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을 잘 읽지 않음

   자기계발서는 중학교 때 더 시크릿 읽다가 진절머리 내면서 던진 뒤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음

   이유는 명확한데, 나는 놀라울 정도로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남이 무엇을 잘 하는지, 어떻게 성공했는지, 어떻게 실패로부터 다시 일어나고 행복을 찾았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왜냐고 물어도 명확한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냥 나는 원래 그렇다. (아마도) 나 자신이 무의식 속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을 거고, 타인이 무엇을 하든 '나'라는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폐쇄적이고 고집이 세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결코 못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며, 타인이 나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물없>이 다루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일부 공감할 수 있었다. 그가 행한 일들을 긍정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에 공감했다는 뜻이다. 자기확신, 낙천성의 방패, 긍정적 착각, 전부 나에게도 들어맞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 나은 점은 나 자신이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종종 뒤돌아보며 자기검열을 한다는 부분일 터다. (어쩌면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걸 긍정적인 효과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내가 적어도 '자기검열'이라는 부분에서는 데이비드보다 낫게 살아왔다고 생각함에도) <물없>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른바 '악마적'인 민낯들이 드러날 때 나는 일종의 수치심과 함께 한번 더 자기검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과학자, 분류학자, 생물학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그냥 나와 관계 없는 '타인'으로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와 똑같이 생물학을 전공했고, <종의 기원>을 읽었으며, 평생을 과학자처럼 사고하며 살아왔다. 마냥 타인으로 치부하기에 그는 나와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하필이면 데이비드가 우생학을 들고 나왔을 때 나는 정말로 스스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물학 전공자로서 우생학이 얼마나 위험하고 그릇된 사상인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잘못되었음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직관이란 무서운 것이라서 때로 우생학의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용기가 있고 강단이 있으며 식견이 넓어 독립운동에 몸바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어 후손을 남기지 못해 지금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 풀이 엉망이라는 이른바 "쭉정이 이론", 이런 것들이 한 발짝, 아니 반 발짝만 잘못 디뎌도 바로 우생학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직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만다. 인간으로 살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평가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기에 무의식중에 평가하고, 급을 매기고, 위아래를 나누며,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를 갈라버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서 뜨끔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그건 도덕적으로도 잘못되었고, 과학적으로도 틀린 일이야.'

   직관을 벗어난다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결국 나는 아직까지도 그 직관을 무너뜨리지 못해서, 대신 우생학의 환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논리와 이성으로 그것을 부정한다.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머리로 납득하고 늘 나 자신에게 주입한다.

   (갑자기 걱정되어 덧붙이자면, 내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우생학적' 평가(이렇게 말하는 것도 거북하다)는 책에서 다루는 1900년대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벼운 수준이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잘나 보이고, 똑똑하고 선량한 사람이 더 좋아 보이고... 정도의 느낌... 물론 이걸 '우월하다'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한 생물이라, 나는 한편으로는 우생학적 관념에 직관적으로 끄덕이다가도 <물없>의 '부적합자'들이 서로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고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자신을 지탱해 나가는 모습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여전히 직관의 산물이다. 나는 폭력보다는 사랑을, 전쟁보다는 평화를, 이기주의보다는 이타주의를 숭상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영원히 추구해 나가야 할 가치이며 유일한 정답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월하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적합자'들의 사랑과 연대, 이타주의와 평화에 감동하는 것이고...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직관에서 벗어나기.

   제법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쉬운 것이 없다. 내 눈 위에 덧씌워진 직관의 커튼을 걷어내기가 너무 힘이 든다. 하지만 평생 노력해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근본을 바꿀 수 없다면, 겉보기라도 바꾸려고 계속해서 노력하면 된다. 겉보기 선의일지라도 결국은 선의가 되듯이.

 

   아무튼 책의 주제로 돌아가자면... 결과적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사실 읽는 내내 이 책이 어떤 결론을 낼지 굉장히 궁금했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룰루 밀러보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그냥 타고나길 우울감이 약하다. 살면서 슬픈 생각, 우울한 생각, 부정적인 생각을 거의 떠올리지 않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건 한창 세상 모든 게 미웠던 사춘기 때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물어도 답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어. (시발 또 선천성 얘기로 돌아가버린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화자인 룰루 밀러보다는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데이비드에게 더 공감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사실 이 책은 내게 필요 없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커졌다. 왜냐하면 나는 룰루 밀러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절대로 총을 떠올릴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지만 오만하게도 '세상에는 그렇게 타고나는 사람이 있고, 약물로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고(금방 고개를 흔들어서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만성 우울증으로 보이는 이 화자가 약물과 현대 의학의 도움 없이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했고 조마조마했으며 한편으로는 응원하게 됐다.

   그래서 룰루 밀러가 결국 해답을 찾아냈을 때 조금 기뻤던 것 같다. "혼돈에 애써 질서를 부여하려 하지 말라. 혼돈을 파괴와 허무로 느끼지 않는다면 질서를 부여하는 일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인식의 전환. 베일을 한 겹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랜만에 좋은 논픽션 책을 읽었다. 나에게 특별히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필요로하지 않는 분야에 관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논픽션의 의의가 꼭 자기계발에 있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잘 쓰여진 한 권의 책이 주는 만족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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